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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정조의 개혁, 농공상업의 발전 영조의 뒤를 왕이 된 사람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였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은 이유는 붕당으로 편을 가르고 대립했기 때문이라 여겼다. 정조는 붕당과 상관없이 능력 있는 사람들을 관리로 뽑았다.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만들고 참신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등용하여 마음껏 연구하도록 하였다. 특히 정조는 서자인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타고난 신분 때문에 능력을 펼칠 수 없었던 서얼들에게도 벼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또한 왕과 궁궐을 지키는 국왕 친위부대라고 할 수 있는 장용위를 만들어 왕의 힘을 키웠다. 50명으로 시작한 장용위는 해마다 인원을 늘려 이후에는 2만여 명에 달하는 큰 군대조직이 되었다.  수원 화성건설정조는 왕의 힘을 키우고 조선사회를 개혁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 더보기
조선을 휩쓴 전쟁들(2) - 정묘호란, 병자호란 정묘호란17세기 초, 명나라의 쇠퇴와 함께 후금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에 대항을 하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후금의 위협에 명나라는 조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금과 대립하고 싶지 않았던 광해군은 명나라를 도우러 가는 강홍립 장군에게 후금과 되도록 대립하지 말고 상항을 봐서 후금에게 항복할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신하들은 불만을 품었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자 조선은 대외정책을 바꾸어 후금에게 등을 돌리고 명나라와 동맹을 강화하게 된다. 조선의 외교 정책에 불만을 품은 후금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1627년 1월 아민이 약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하였다.. 더보기
조선을 휩쓴 전쟁들(1) - 임진왜란 전쟁의 배경16세기 조선은 붕당들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려고 맞서면서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었다. 또 오랫동안 외적의 침입이 없었던 터라 국방에도 소홀해져 있었다. 한편 16세기 후반,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의 강력한 지도자들에 의해 전국시대가 종식되고 있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의 불안을 외부로 돌리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조선을 정복하고 나아가 명나라를 침략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이를 위해 조선에 여러 차례 협조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명나라와의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중시하여 히데요시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전쟁의 발발1592년(임진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군은 빠른 속도로 한반도 남에.. 더보기
조선의 신분 제도와 삶 조선 시대에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로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로부터 신분을 물려받았다. 신분에 따라 생활과 권리, 의무가 크게 달랐다. 신분은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나눠지고 양인은 다시 양반, 중인, 상민으로 구분되었다. 양인 중 양반과 중인은 지배층으로 분류되고 나머지 상민과 노비는 피지배층으로 구분된다.  양인양반지배층중인상민피지배층천인노비 양반조선은 양반이 중심이 된 나라였다. 양반은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집안의 사람'을 의미했다. 이들은 주로 공부하여 과거 시험을 보고 나라의 관리가 되었다. 관리가 된 뒤에는 나라로부터 땅과 곡식을 받고, 노비들을 거느리면서 부족함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양반은 또한 군역도 면제가 되었으며 심지어 죄를 지어도 벌금을 물고 끝내거나 집안이 노비가 대신 벌을 받는 경우도.. 더보기
세조, 성종, 연산군, 중종 세조(수양대군)의 즉위 과정세종이 죽고 왕위에 오른 문종은 몸이 쇠약하여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문종이 죽자 그 아들 단종이 즉위하였다. 하지만 당시 단종의 나이는 열두 살에 불과했다. 문종은 숨을 거두면서 김종서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다. 자연스럽게 김종서와 그 주변 신하들에게 권력이 넘어가게 되었고 단종의 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왕족들은 불안함을 느끼고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단종은 수양 대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종서가 반역을 일으켜 안평대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모략을 꾸며 김종서를 비롯한 반대파를 없애 버린 것이다. 왕이 되는데 방해가 되는 안평 대군마저 귀양을 보내 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단종은 스스로 물러나고 수양대군에게 왕.. 더보기
셋째 양녕대군 제4대 임금이 되다(세종대왕) 세종의 즉위태종에게는 왕후 민 씨가 낳은 양녕 · 효령(孝寧) · 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다. 원래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며 후에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후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위하고 셋째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게 되는데 이는 양녕대군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을 수 없다는 신하의 청이 있었고 그에 반해 충녕대군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많은 신하 또한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태종도 이에 동의하여 충녕대군을 새로이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책봉 두 달 후 태종 스스로 왕위를 충녕대군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니 마침내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이다. 한편 둘째 효령대군은 형인 양녕.. 더보기
조선의 건국, 태조와 태종 조선의 건국과 한양 천도1392년 마침내 이성계가 왕이 되었으니 바로 제1대 임금 태조이다. 이성계는 나라의 이름을 고려로 하고 수도도 개경으로 두었다. 고려의 신하와 관료들도 직책을 얼마 간은 유지했다. 이는 공양왕을 죽이고 왕이 된 이성계 자신에 대한 신하와 백성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으니 이는 과거 단군이 세운 고조선과 같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1394년 한양을 조선의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였다. 한양은 지리적으로 나라의 가운데 있어 전국 어디로든 쉽게 갈 수 있었으며 한강을 이용해 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기 편리했다. 또한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서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도 유리했다. 경복궁, 종묘, 사직단이성계는 한양 천도 후 정도전의 의.. 더보기
고려의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 고려 말기에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과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왜구들은 고려의 바닷가 마을에 쳐들어와 식량을 빼앗고 집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마구 죽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는 무신들이 이름을 널리 알렸으니 대표적 인물로 최영과 이성계가 있었다. 그중 이성계는 뛰어난 활 솜씨와 지휘력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연달아 막아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는 고려 말 최대의 군벌로서 실력만 아니라 급진 신진사대부들의 뒷받침으로 고려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요동 정벌한편 중국에서는 홍건적의 우두머리였던 주원장이 세력을 키워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웠다. 명나라는 고려에 무리한 조공을 지속해서 요구했다. 우왕 때에 와서는 명나라는 고려에 철령 이북 지방의 땅까지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철령 이북 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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