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수양대군)의 즉위 과정
세종이 죽고 왕위에 오른 문종은 몸이 쇠약하여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문종이 죽자 그 아들 단종이 즉위하였다. 하지만 당시 단종의 나이는 열두 살에 불과했다. 문종은 숨을 거두면서 김종서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다. 자연스럽게 김종서와 그 주변 신하들에게 권력이 넘어가게 되었고 단종의 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왕족들은 불안함을 느끼고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단종은 수양 대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종서가 반역을 일으켜 안평대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모략을 꾸며 김종서를 비롯한 반대파를 없애 버린 것이다. 왕이 되는데 방해가 되는 안평 대군마저 귀양을 보내 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단종은 스스로 물러나고 수양대군에게 왕의 자리를 내주었다. 이제 수양대군은 조선의 제7대 임금인 세조가 되었다. 후에 성삼문, 박팽년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 단종의 복위를 시도하자 집현전을 폐지하고 그 일과 관련된 신하들을 처형하고 어린 단종마저 죽여 버렸다. 세조는 자신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한명회, 신숙주 같은 이들을 공신이라 하여 중요한 자리에 임명했다. 이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며 훈구파가 되었다. 훈구파는 땅과 노비를 받았으며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았다. 이들의 자손들까지도 높은 벼슬을 받는 등 혜택을 누렸다.
성종
세조가 죽고 그의 둘째 아들이 1468년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니 조선 제8대 임금 예종이다. 하지만 재위 1년 개월 만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예종이 죽고 그의 아들이 아직 어리자, 정희 대비가 신하들과 의논하여 13살에 불과한 예종의 조카를 왕위에 이어 받게 하니 그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다. 성종은 즉위 후 7년 동안 수렴청정을 거친 후에 나라를 직접 다시를 수 있었다. 성종은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국사를 처리하고 정치를 안정시켰으며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유교 정치에 힘 쏟기 위해 홍문관을 만들어 젊고 능력 있는 학자들을 길렀다. 지리책인 동국여지승람, 역사책인 동국통감 등의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성종은 자신을 따르고 훈구파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새로운 관리를 뽑아 곁에 두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부분 성리학을 공부하고 교육에 힘쓰던 인물들로 '사림파'라고 불렸다. 사림파는 훈구파를 비판하며 그들과 대립하는 세력으로 자랐다. 한편 세조 때부터 만들었던 '경국대전'이 성종에 이르러 완성이 되었다. 경국대전은 조선을 다스리는 데 기준으로 삼은 법전으로 나라의 관리 방법, 형벌, 세금 제도, 과거 제도, 혼인 상제, 백성들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규범들을 망라했다.
연산군과 중종반정
1494년 성종이 죽고 그의 첫째 아들인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는 투기와 저주 행위 등의 부도덕함으로 인해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성종이 후궁들을 아끼자,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내기도 하였다. 결국 윤씨는 후궁을 죽이려고 독약을 숨긴 사실이 밝혀져 1479년 폐위가 되고 1482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나중에야 이 모든 다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폐비 윤씨 사태를 주도했던 성종의 두 후궁인 엄씨와 정씨를 비롯하여 당시의 관련 있던 대신들을 처형하였다. 또한 두 후궁의 아들들까지 모두 죽이고 이미 사망한 신하들까지 부관참시하였으니 이 일련의 사건이 갑자사화이다. 이후에도 연산군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잔치를 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백성들을 쫓아내고 집을 부숴 자신만의 사냥터를 만들기도 했다. 연산군의 이러한 폭정은 신하들과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 결국 1506년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사병들로 거병하여 연산군의 측근들을 살해하고 연산군을 체포하여 경기도 교동에 추방되었으니 이를 중종반정이라 한다. 이후에 강화도로 유배된 후 병이 들어 31세 나이로 사망했다.
중종과 조광조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내고 그의 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조선의 11대 임금 중종이다. 중종은 사림파와 힘을 합하여 새롭게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당시 사림파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신하가 있었으니 바로 조광조였다. 그는 교육, 성리학자, 정치 등 많은 분야에서 능력을 나타내고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낸 인재였다. 조광조는 왕에게 바른말을 많이 하였는데 이는 훈구파들의 미움을 사게 된다. 훈구파는 이런 조광조를 음해하기 위해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써서 벌레가 글씨 부분을 갉아먹게 한 뒤 왕에게 보여 주었다. 주[走]와 초[肖]를 합하면 조[趙]가 되니 주초위왕이란 '조 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조광조가 부담스러웠던 중종은 이 사건을 빌미로 하여 조광조를 귀양 보내 사약을 내리고 사림파를 몰아냈다. 이렇듯 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인 대립 속에 백성들의 삶은 어려워지고 삼포에서 일본 거류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등 어지러운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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