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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셋째 양녕대군 제4대 임금이 되다(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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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즉위

태종에게는 왕후 민 씨가 낳은 양녕 · 효령(孝寧) · 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다. 원래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며 후에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후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위하고 셋째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게 되는데 이는 양녕대군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을 수 없다는 신하의 청이 있었고 그에 반해 충녕대군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많은 신하 또한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태종도 이에 동의하여 충녕대군을 새로이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책봉 두 달 후 태종 스스로 왕위를 충녕대군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니 마침내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이다. 한편 둘째 효령대군은 형인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고 동생 세종이 세자에 책봉되자 불교에 심취하였다. 태종은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군사 문제나 나라의 중요한 결정은 상왕이 된 후에도 직접 관여를 하였다. 세종은 상왕의 눈치를 보면서 혹독한 군주 수업을 받았다. 1422년 태종이 죽고 재위 4년 만에 세종은 임금으로써 전권을 행사하게 된다.

세종 대왕 영정

 

 

집현전의 설치와 학문의 발달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펼쳐나갔다. 세종은 깊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집현전을 두어 젊은 학자들이 모여 연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신숙주, 성인지, 성삼문 등 당대의 수재들을 등용하여 연구를 분담시켰다. 집현전에서는 유교만 아니라 윤리, 농업, 지리, 측량, 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와 저술을 하였으며 조세, 재정, 형법, 교통 등의 제도들을 정비했다. 세종은 과학기술과 천문학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자격루, 혼천의 등을 만들어 백성의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박연을 시켜 아악을 연구하고 정리하도록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세종은 백성들이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또한 백성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리고, 사람이 지켜야 하는 도리를 알기 위해 백성들도 글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1443년 집현전의 학자들과 더불어 훈민정음을 만들고 1446년 반포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현재 인류가 쓴 수백 가지의 문자 중에서 그 기원과 과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문자는 한글뿐이고, 또 그 기원과 과정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인류 역사상 유일한 책이 바로 '훈민정음'이다. 처음에 훈민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었을 때 최만리를 비롯한 여러 신하와 양반들은 한자를 쓰지 않고 한글을 쓰는 것은 중국의 제도를 버리는 것이라 부당하다 상소했다. 하지만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고 훈민정음을 쓰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하였다. 세종은 나랏일에 쓰는 공문서를 훈민정음으로 작성해서 의금부와 승정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언문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뽑을 때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에 추가하였다. 백성들에게도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등의 책을 훈민정음으로 편찬하였다. 도움이 되는 책의 내용이었기에 백성만 아니라 양반들도 점차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의 조력자들 - 김종서, 황희, 맹사성

조선 초기 왜구를 무찌르고 쓰시마 섬을 정벌한 이종무의 활약으로 한반도의 남쪽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조선의 북쪽 국경선은 여진이 호시탐탐 국경을 넘어와 마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에 세종은 최윤덕과 김종서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백두산과 두만강 지역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우예, 여연, 자성, 무창)과 6진(종성, 회령, 부령, 온성, 경원, 경흥)을 설치하였다. 그곳에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함으로써 영토가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오늘날의 한반도 북쪽 국경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세종 때에는 지금까지도 알려진 훌륭한 재상이 둘이 있었다. 바로 황희와 맹사성이다. 황희는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에 이르는 조선의 5대 임금을 모셨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고 인정받는 신하였다. 그는 조선에서 영의정만 18년 좌의정, 우의정까지 포함하면 총 24년을 정승 자리에 있었다. 이는 그의 의도한 바라기보다는 왕의 의지와 본인의 장수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종은 많은 나랏일을 황희와 의논하여 결정했다. 황희는 6조 판서직을 모두 수행하면서 얻은 경험과 추진력과 결단력 등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런 황희를 세종은 총애하여 영의정이 된 후 은퇴하기까지 20년 가까이 신하로 썼으며 황희가 은퇴를 거듭 요청해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맹사성은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최영의 손주사위였으니 능력이 뛰어나 태조가 연좌하지 않고 신하로 쓴 인물이다. 맹사성은 황희와 달리 어질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세종을 도와 교육과 제도 정비를 하는 데 힘썼다. 1435년 고령으로 은퇴하였으나 그 이후에도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맹사성에게 자문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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