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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조선을 휩쓴 전쟁들(1) -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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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배경

16세기 조선은 붕당들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려고 맞서면서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었다. 또 오랫동안 외적의 침입이 없었던 터라 국방에도 소홀해져 있었다. 한편 16세기 후반,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의 강력한 지도자들에 의해 전국시대가 종식되고 있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의 불안을 외부로 돌리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조선을 정복하고 나아가 명나라를 침략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이를 위해 조선에 여러 차례 협조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명나라와의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중시하여 히데요시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전쟁의 발발

1592년(임진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군은 빠른 속도로 한반도 남에서 북으로 침투하였고 주요 도시와 성을 점령했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일거에 함락되고 10일 만에 경상도가 넘어갔다. 이후 수일 만에 조선군은 충주의 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였다. 전쟁 초기에 조선의 대응은 매우 미흡했다. 조선군은 일본군의 신속한 진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내부의 혼란과 지휘 체계의 붕괴로 인해 많은 성과 도시가 빠르게 함락되었다. 조선의 왕 선조는 전쟁 초기의 혼란 속에서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선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명나라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그해 12월 4만 5000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임진왜란 일본군 침입로 (출처 : 우리 역사 넷)

의병의 봉기와 조선 수군의 활약

일본의 침략에 맞서 조선 전역에서는 자발적으로 무장한 의병들이 조직되었다. 양반, 상민, 노비, 심지어 승려까지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이들은 자기 고장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산속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공격하는 식으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곽재우, 조현, 고경명 등의 의병장은 지역에서 활동하며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곽재우는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2천 명에 이르는 이병을 이끌고 의령, 창녕 등지의 산악에 매복하고 있다가 왜군을 공격하였다. 그의 활약으로 왜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하고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다. 곽재우는 붉은 비단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아군의 맨 앞에서 싸웠기 때문에 홍의장군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였다. 조선은 바다에서도 일본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옥포에 이어 사천, 당포에서 일본 해군을 파하였다. 조선의 수군은 잘 숙련된 데다가 튼튼한 판옥선과 거북선을 비롯하여 우수한 무기를 갖추었다. 이순신은 명량, 한산도 대첩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아울러 조선은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지원했고, 이는 전쟁의 양산을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명군과 조선군과 연합하여 1593년(계사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본군을 남쪽으로 몰아냈다. 연이은 패배로 일본은 조선에서 협상을 요구했다. 조선은 이를 반대했으나 명나라가 이를 받아들이고 협상을 벌였다. 명나라와 일본은 3년에 걸친 협상은 결국 결렬되고 만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출처 : 서울시)

 

정유재란( 丁酉再亂)

일본은 3년간의 협상에서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597년 7월 다시 조선을 공격했으니 이를 정유재란이고 한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게 대패하면서 조선 해군의 전력은 크게 약화됐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거의 전멸하였으며 일본군은 해상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칠천량 해전 패전으로 원균이 물러나고,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했다. 그는 남은 병력과 자원을 동원해 전열을 재정비하여 일본 수군에 맞섰다.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일본 수군과 맞서 싸워 크게 승리하게 된다. 이로써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다시 차단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진주성 전투, 울산성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면서 전세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쪽으로 기울어졌다. 일본군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결국 본국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왜군을 쫓아 함대를 대파하여 승리했으니 전투 중에 전사하고 만다. 

 

전쟁의 후유증과 영향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조선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손실을 보았다. 긴 전쟁으로 경복궁, 불국사 등 건축물들이 불타 없어졌다. 많은 사람이 전쟁 중에 사망하거나 포로로 끌려갔으며, 전쟁으로 인해 농업 생산이 중단되어 기근과 질병이 만연했다. 많은 사람이 삶이 터전을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으며 나라의 살림도 어려워졌다. 또한 전쟁 중 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약탈한 서적, 도자기, 공예품 등을 자국으로 가져갔으며, 많은 기술자와 학자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전쟁은 조선의 정치에도 영향을 주었다. 전후 복구과정에서 중앙 집권화가 강화되었다. 또한 전쟁의 교훈을 바탕으로 정책을 개선하고, 국방과 행정 체계를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라 밖에도 변화가 감지되었다.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던 명나라는 국력이 쇠약해졌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새로운 변화와 발전의 계기를 제공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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