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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정조의 개혁, 농공상업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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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뒤를 왕이 된 사람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였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은 이유는 붕당으로 편을 가르고 대립했기 때문이라 여겼다. 정조는 붕당과 상관없이 능력 있는 사람들을 관리로 뽑았다.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만들고 참신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등용하여 마음껏 연구하도록 하였다. 특히 정조는 서자인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타고난 신분 때문에 능력을 펼칠 수 없었던 서얼들에게도 벼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또한 왕과 궁궐을 지키는 국왕 친위부대라고 할 수 있는 장용위를 만들어 왕의 힘을 키웠다. 50명으로 시작한 장용위는 해마다 인원을 늘려 이후에는 2만여 명에 달하는 큰 군대조직이 되었다. 

정조 표준영정


 
수원 화성건설
정조는 왕의 힘을 키우고 조선사회를 개혁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칭호를 높이고 그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정약응을 책임자로 하여 정조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로 하고 화성을 쌓기 시작했다. 정조는 화성 축조를 통해 수도의 남쪽에 군사권을 마련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즉 적군이 한양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는 남쪽의 방어성의 성격이었던 것이다. 수원화성은 1794년에 착공하여 1796년에 축성되었으며 성곽의 총 길이는 5.7 Km에 달한다. 정조의 명령을 받은 정약용은 거중기와 녹로 등의 기구를 발명, 제작하여 3년도 걸리지 않은 기간에 화성을 완성하였다. 화성에는 관청을 세우고, 큰길과 저수지를 만들었으며, 농사를 지을 땅을 일구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중심가에 상점을 만들어 상인들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혜택도 부여하였다.  화성은 축성 이후 많은 자연재해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었으나, 축성 당시의 그림과 글로 설계도를 남겨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 

 

신문고 설치 
영조와 더불어 정조도 백성들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 것으로 유명했다. 영조는 조선 초기 도입된 후 사라진 신문고 제도를 되살려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으려고 했다. 신문고는 궁궐에 달아 놓은 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그 북을 쳐서 자신들의 사정을 왕에게 직업 알릴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정조는 자신이 궁궐밖으로 행차를 할 때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백성들이 징이나 꽹과리를 울리며 앞으로 나와 자신의 억울함을 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억울한 사정을 들으면 궁궐로 돌아가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농사법의 발전
모낵법은 볍씨를 뿌려 싹이 난 모를 논에 옮겨 심는 농사법으로 고려말기에 중국에서부터 보급되었으니 한반도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로 정착이 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모내기법의 보급으로 거두어들이는 농작물의 양이 크게 증가하였다. 논에 직접 씨를 뿌리지 않으니 보리와 벼를 같은 논에서 기를 수가 있게 되었다. 모를 논에 옮겨 심을 때 줄을 맞추어 심을 수 있어 잡초를 쉽게 가려 뽑을 수 있어 일손을 절약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고구마, 청나라에서 감자와 토마토, 호박, 고추 등 새로운 작물이 들여와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고구마와 감자 같은 작물은 가뭄이나 홍수 등으로 흉년이 들면 쌀 대신 식량으로 쓰일 수도 있었다. 
 


실학자들의 등장
실학자들은 원래 성리항을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성리학이 백성들이 겪고 있는 현실 문제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 유형원, 정약용등의 실학자들은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였고, 박제가는 상공업 발달등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하였다. 또한 우리 역사를 연구하거나, 다른 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정약용은 실학을 연구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기구들을 발명하였다. 특히 거중기와 녹로를 발명하여 힘을 덜 들이고 무거운 돌을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정약용은 그를 아끼던 정조가 죽은 뒤 천주교를 믿는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18년 귀양살이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포등 500여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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