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전체 글

조선의 신분 제도와 삶 조선 시대에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로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로부터 신분을 물려받았다. 신분에 따라 생활과 권리, 의무가 크게 달랐다. 신분은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나눠지고 양인은 다시 양반, 중인, 상민으로 구분되었다. 양인 중 양반과 중인은 지배층으로 분류되고 나머지 상민과 노비는 피지배층으로 구분된다.  양인양반지배층중인상민피지배층천인노비 양반조선은 양반이 중심이 된 나라였다. 양반은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집안의 사람'을 의미했다. 이들은 주로 공부하여 과거 시험을 보고 나라의 관리가 되었다. 관리가 된 뒤에는 나라로부터 땅과 곡식을 받고, 노비들을 거느리면서 부족함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양반은 또한 군역도 면제가 되었으며 심지어 죄를 지어도 벌금을 물고 끝내거나 집안이 노비가 대신 벌을 받는 경우도.. 더보기
세조, 성종, 연산군, 중종 세조(수양대군)의 즉위 과정세종이 죽고 왕위에 오른 문종은 몸이 쇠약하여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문종이 죽자 그 아들 단종이 즉위하였다. 하지만 당시 단종의 나이는 열두 살에 불과했다. 문종은 숨을 거두면서 김종서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다. 자연스럽게 김종서와 그 주변 신하들에게 권력이 넘어가게 되었고 단종의 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왕족들은 불안함을 느끼고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단종은 수양 대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종서가 반역을 일으켜 안평대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모략을 꾸며 김종서를 비롯한 반대파를 없애 버린 것이다. 왕이 되는데 방해가 되는 안평 대군마저 귀양을 보내 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단종은 스스로 물러나고 수양대군에게 왕.. 더보기
셋째 양녕대군 제4대 임금이 되다(세종대왕) 세종의 즉위태종에게는 왕후 민 씨가 낳은 양녕 · 효령(孝寧) · 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다. 원래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며 후에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후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위하고 셋째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게 되는데 이는 양녕대군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을 수 없다는 신하의 청이 있었고 그에 반해 충녕대군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많은 신하 또한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태종도 이에 동의하여 충녕대군을 새로이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책봉 두 달 후 태종 스스로 왕위를 충녕대군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니 마침내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이다. 한편 둘째 효령대군은 형인 양녕.. 더보기
조선의 건국, 태조와 태종 조선의 건국과 한양 천도1392년 마침내 이성계가 왕이 되었으니 바로 제1대 임금 태조이다. 이성계는 나라의 이름을 고려로 하고 수도도 개경으로 두었다. 고려의 신하와 관료들도 직책을 얼마 간은 유지했다. 이는 공양왕을 죽이고 왕이 된 이성계 자신에 대한 신하와 백성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으니 이는 과거 단군이 세운 고조선과 같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1394년 한양을 조선의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였다. 한양은 지리적으로 나라의 가운데 있어 전국 어디로든 쉽게 갈 수 있었으며 한강을 이용해 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기 편리했다. 또한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서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도 유리했다. 경복궁, 종묘, 사직단이성계는 한양 천도 후 정도전의 의.. 더보기
고려의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 고려 말기에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과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왜구들은 고려의 바닷가 마을에 쳐들어와 식량을 빼앗고 집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마구 죽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는 무신들이 이름을 널리 알렸으니 대표적 인물로 최영과 이성계가 있었다. 그중 이성계는 뛰어난 활 솜씨와 지휘력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연달아 막아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는 고려 말 최대의 군벌로서 실력만 아니라 급진 신진사대부들의 뒷받침으로 고려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요동 정벌한편 중국에서는 홍건적의 우두머리였던 주원장이 세력을 키워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웠다. 명나라는 고려에 무리한 조공을 지속해서 요구했다. 우왕 때에 와서는 명나라는 고려에 철령 이북 지방의 땅까지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철령 이북 지.. 더보기
고려 무신 정권 그리고 몽골의 침략 거란과의 전쟁 이후 약 200년간의 평화가 이어지던 고려에 위기가 닥쳤다. 오랫동안 무시당했던 고려의 무신들이 일어나 문신들을 내쫓고 권력을 차지하고 부패를 저질렀다. 차별받던 백성들이 전국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으로 초원을 정복하고 세계를 휩쓸던 몽골이 고려에 침략을 시작한 것이다. 차별과 무신의 반란고려의 무신은 나라를 지키는 위중한 일을 담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는 대접을 받지 못했다. 군대를 이끄는 총사령관 또한 무신이 아닌 문신이 맡았다. 거란을 물리친 서희와 강감찬도 무신 출신이었다. 날이 갈수록 문신들은 무신들을 깔보았고 무신들은 차별에 대한 분노가 커지고 있었다. 어느 날 새 임금이 된 의종이 술자리에서 무술 시합을 열었다. 나이가 많은 장군 이소응을 젊은 무신과 겨루게 하였.. 더보기
고려의 문화와 불교 고려는 문벌 귀족의 집권기에 가장 번영했으며 기술력과 아름다움이 뛰어났다. 고려청자가 대표적인 예술품이다. 고려는 벽란도, 금주 등을 통해 해외와도 활발히 교역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켰다. 고려가 멸망한 뒤에도 한반도 국가들을 '고려'로 불렸고 현재 한국을 코리아(Korea)로 부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조선과 달리 고려는 여성의 이혼을 허용하는 등 나름 개방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삼국사기삼국사기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 1145년경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이 편찬하였다. 국사 편찬은 왕권 강화의 기념적 사업이며 당시의 정치, 문화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때 고려는 문벌귀족문화가 발달하고 유교와 불교문화가 융합하며 왕조도 안정되었던 시기였다. 삼국사기 외.. 더보기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북쪽에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세력을 키워가는 한편 중국 땅에서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세워졌다. 거란은 926년 발해를 쓰러뜨리고, 중국 북쪽의 땅을 차지한 후 낙타를 보내는 등 고려와의 교류를 원했다. 하지만 왕건은 이를 거절했다. 고려는 오히려 송나라와 교류하며 거란을 견제했다. 송나라를 차지하고 싶었던 거란은 거란이 송나라를 공격할 때 고려가 거란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고려를 먼저 굴복시키기를 원했다. 거란의 침입과 서희의 담판993년 거란군이 고려를 공격해 왔다. 거란은 옛 고구려의 영토를 내놓고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고려의 서희가 거란의 총사령관 소손녕을 찾아가 협상하였다. 서희는 고려가 거란을 멀리하고 송나라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에 서희는 압록강 동쪽의 여..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