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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려 무신 정권 그리고 몽골의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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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과의 전쟁 이후 약 200년간의 평화가 이어지던 고려에 위기가 닥쳤다. 오랫동안 무시당했던 고려의 무신들이 일어나 문신들을 내쫓고 권력을 차지하고 부패를 저질렀다. 차별받던 백성들이 전국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으로 초원을 정복하고 세계를 휩쓸던 몽골이 고려에 침략을 시작한 것이다.

 

차별과 무신의 반란

고려의 무신은 나라를 지키는 위중한 일을 담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는 대접을 받지 못했다. 군대를 이끄는 총사령관 또한 무신이 아닌 문신이 맡았다. 거란을 물리친 서희와 강감찬도 무신 출신이었다. 날이 갈수록 문신들은 무신들을 깔보았고 무신들은 차별에 대한 분노가 커지고 있었다. 어느 날 새 임금이 된 의종이 술자리에서 무술 시합을 열었다. 나이가 많은 장군 이소응을 젊은 무신과 겨루게 하였는데 그가 젊은 무신에게 패하자 어린 문신 한뢰가 나서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이소응은 무신이 오를 수 있는 두 번째로 높은 지위인 대장군이었으며 환갑을 넘은 노인이었다. 결국 이 사건이 불씨가 되어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문신들을 마구 학살하였으며 의종을 폐위시킨 후 무신 정권을 세웠다. 이후 고려에는 무신들의 시대가 열렸다. 무신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며 싸웠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차례로 최고 벼슬에 올랐다. 경대승이 변으로 죽은 뒤에는 천민 출신인 이의민이 권력을 잡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의민마저 최충헌의 손에 죽고 말았다. 그 이후 최충헌은 20여 년과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으며 최 씨 정권을 연 첫 권력자가 되었다. 최충헌이 죽고 난 후에도 최우, 최항, 최의가 대를 이으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 기간에 왕들은 최 씨의 눈치를 보는 허수아비와 마찬가지였다.

무신 정변 연표 ( 출처 : 나무위키 )

 

망이·망소이의 , 만적의 난

무신 집권기인 1176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숯을 만들던 명학소 사람들이 망이, 망소이 형제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들은 순식간에 공주 지역을 점령하자,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올려 주고 그들을 달래려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토벌군을 앞세워 다시 공격하고 망이, 망소이 형제가 항전하면서 진압이 될 때까지 1년 6개월간 내분이 지속되었다. 만적의 난은 1198년 최충헌의 노비 만적 등이 신분제에 대한 불만을 품었다. 만적은 자신과 생각이 같은 노비들을 모아 반란을 꾀했으나 동료의 배신으로 만적의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다. 만적과 그의 동료 100여 명이 강물에 던져져 죽음을 맞았다. 이 저항은 이후 무신 집권기에 노예들의 저항에 영향을 주었다.

 

몽골의 침략

최 씨 무신 정권이 안정될 무렵, 중국 북쪽에서 테무친이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스스로를 칭기즈칸이라 칭했다. 칭기즈칸은 용감한 기병을 앞세워 순식간에 세계를 정복해 나갔다. 금나라를 시작으로 중국과 유럽의 일부 지역까지 휩쓸었다. 몽골군은 날쌔고 용맹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전투 방식은 너무나 잔인했다.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죽이고 마을을 약탈하여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기도 하였다. 1231년 1차 침입을 시작으로 1259년 고려와 몽골 사이의 강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약 30년 동안 지속되어 고려에 큰 피해를 주었다. 최우는 몽골의 1차 침입 직후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천도는 몽골로부터 왕을 지키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그보다는 최 씨 정권의 유지를 위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1259년 강화가 체결된 이후에도 불안하게 전개되던 고려-몽골의 관계는 무신 집권의 종식과 함께 1270년 개경으로 환도가 이루어졌다. 이후 고려-몽골의 관계는 몽골의 고려에 대한 많은 정치적 간섭과 압제가 이루어졌다. 전쟁으로 인한 고려의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고 끌려가거나 죽은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었다. 고려는 태자를 몽골 황제에게 볼모로 보내고 화해를 청해야 했다. 한편 고려는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신라 시대에 세워졌던 황룡사 구 층 목탑,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만든 대장경 등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원나라의 간섭

몽골은 고려와의 긴 전쟁 끝에 강화를 맺고 나라의 이름을 원으로 바꾸었다. 이후 고려의 내정간섭을 시작하였다. 고려의 세자를 원나라 황실에 볼모로 보냈다. 이후 원나라의 공주를 고려의 왕비로 맞아들이도록 하였다.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한 뒤로 다섯 명의 고려 왕들이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원나라는 고려의 왕에게 충성을 강요하며 왕 이름에도 '충' 자를 넣도록 했다. 또한 원나라에 거역하는 왕은 멀리 유배를 보내기도 했는데 실제 충선왕은 왕에서 물러나게 한 후 티베트까지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원나라 사신들은 고려의 여인들을 공녀로 뽑아 원나라로 끌고 갔다. 끌려간 여자들은 궁에서 일을 하거나 원나라 사람과 결혼했다. 공녀를 뽑을 때는 왕족이나 관리, 일반 백성의 딸을 가리지 않았다. 고려에서는 공녀로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딸이 태어나면 비밀로 하거나, 일찍 결혼시키는 풍습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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