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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통일 신라의 찬란한 불교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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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주변국들과 더 이상 전쟁이 없었고 인구도 늘어났으며, 불교의 발전으로 금성(경주)은 눈부신 불교문화의 유산들로 채워졌다. 지방 곳곳에 큰 절이 세워지고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발달하였다.

 

대왕 바위 - 문무왕의 전설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더 이상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바다 건너에 있는 왜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동쪽 바닷가에 뿌려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신하들은 이를 따라 동해 감포 앞바다의 커다란 바위 아래에 문무왕을 모셨다. 이곳이 바로 대왕 바위로 불리는 문무왕의 무덤이다. 신라인들은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왜로부터 신라를 지켜 준다고 믿으며 살았다.

 

안압지

신라는 통일 후 궁궐 안에 인공 연못을 만들었다. 훗날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모습을 보고 안압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압지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거나 잔치를 베푸는 장소로 쓰였다. 연못에 섬을 만들어 나무와 꽃을 심었고, 사슴과 노루를 풀어 두기도 하였다. 안압지에서 발견된 유물을 보면 당시 신라 왕족들과 귀족들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문고리 하나도 금동으로 만드는가 하면 가위, 머리빗, 청동 숟가락 등도 사용하였다. 안압지에서 발견된 주령구는 일종의 주사위로 간지럽히기, 술 석 잔 마시기 등의 놀이 벌칙이 적혀 있기도 하였다.

 

9주 5 소경

통일 신라의 신문왕은 전국을 아홉 개의 주로 나누고 다섯 개의 소경을 두었다. 도읍지 금성이 통일 신라의 수도를 하기에는 위치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5개 소경은 금성과 함께 각 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지방 귀족을 감시하는 일도 하였다. 또 문무 관리에게는 관료전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었던 녹읍을 폐지하기도 했다.

통일신라 9주 5소경

 

신라의 귀족

통일 후 신라의 귀족들은 더 넓은 땅을 가지게 되었다. 더 많은 노비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 수가 몇천 명까지 늘어나기도 하였다. 이들은 화려하게 꾸민 집에서 사치스럽게 살았다고 한다. 집 안에는 당나라와 아라비아에서 수입한 비단. 양탄자. 보석, 유리그릇도 있었다.

 

조세제도

삼국을 통일하면서 이전보다 넓은 토지와 많은 농민을 지배하면서 조세를 생산량의 10분의 1로 완화하였다. 신라에서는 마을 단위로 세금을 거두었으며 이를 정확히 걷기 위해 각 마을의 특징에 대해서 꼼꼼히 기록하였다. 남자 어른과 아이의 수, 여자 어른과 아이의 수, 논과 밭의 넓이 및 가축의 수까지 기록하였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져 있고, 16에서 60세까지 남자가 대상이었다. 또 토지 제도를 바꾸어 귀족의 녹읍을 폐지하고,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했다. 

 

불교문화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여진 초기에는 주로 왕족과 귀족들만 부처님을 믿었다. 경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글자를 몰랐기 때문이다. 승려 원효는 백성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의상 대사와 함께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동굴에서 하룻밤을 지내냈다. 원효는 잠결에 목이 말라서 바가지에 고여 있는 물을 마셨다. "물이 참 달고 맛있구나!" 다음 날 아침,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모르고 마실 때는 시원하고 맛있더니 알고 나니 구역질이 나는구나. 그래.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깊은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파하였다.

승려 혜초는 신라 최초로 인도에 다녀온 사람이었다. 어려서 승려가 된 혜초는 불교를 공부하러 중국 당나라에 갔다가 인도의 승려인 금강지를 만나 공부하다가, 열아홉 살에 부처님이 태어난 인도에 가게 되었다. 그는 4년 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책을 썼다. 왕오천축국전에는 인도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의 종교, 풍속, 문화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담겨 있다.

 

불국사

신라의 재상이 된 김대성은 신라를 부처님의 나라로 만들고 싶었던 경덕왕과 함께 불국사를 지었다. 불국사는 '부처님의 나라'라는 뜻이다. 불국사에는 청운교와 백운교라는 돌계단이 있다. 돌계단 아래는 사람들의 세상이고, 돌계단으로 올라가 지하 문을 지나면 부처님의 나라가 시작됨을 의미하였다. 불국사의 대웅전과 지하 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마부보고 서 있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 10.29m, 10.75m에 이른다.

 

석굴암

석굴암 또한 재상 김대성 주도로 축조되었다. 김대성은 현생의 어머니를 위해서 불국사를, 전생의 어머니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석굴암은 동해가 보이는 경주 토함산에 자리 잡고 있으며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자연이 만들어 낸 석굴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인조 석굴이다. 석굴 안에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이 모습을 불상으로 만들었다. 석굴암은 습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이끼를 막기 위해 바닥 아래쪽으로 샘이 흐르도록 설계한 과학적인 건축물이다.

통일신라 석굴암

 

 

통일 신라의 멸망

780년 무렵부터 왕위 다툼이 심해지면서 신라는 힘을 잃어갔다. 진골 귀족들은 서로 왕위를 차지하려 끊임없이 싸웠으며 150년 동안 스무 번이나 왕이 바뀌었다. 귀족들도 재산과 땅을 불리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 890년 무렵에는 큰 흉년까지 들어 세금을 내지 못한 농민들이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닐 정도였다. 왕의 권력이 약해지고 지방을 다스릴 힘조차 사라지니 지방에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다. 견훤과 궁예가 호족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견훤은 900년에 후백제를, 궁예는 901년에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렇게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 세 나라가 서로 경쟁하는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후고구려에서는 폭정으로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을 중심으로 고려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35년, 신라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면서 천년을 이어 온 신라가 멸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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