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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구려의 건국과 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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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건국

고조선이 멸망한 다음 한반도에는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을 지배하려고 하였다. 이 무렵 주변에서 여러 나라들이 새로 생기게 되었다. 만주 지역에는 고구려와 부여가 한반도 남쪽에는 삼한 그리고 동쪽에는 옥저와 동예가 세워졌다. 이 중 만주 땅을 중심으로 부여가 세력을 키웠다. 부여는 기원전 3세기부터 약 600년 동안 명맥을 이어갔다. 부여인 중에서 주몽이라는 인물이 사람들을 이끌고 졸본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바로 고구려다. 이후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궐을 세우며 국력을 키웠다. 곧이어 옥저와 동예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주둔하던 중국 한나라군까지 몰아내면서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는다.

 

 

고구려의 영토확장과 광개토대왕

세종 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광개토 대왕은 고구려의 제19대 태왕으로 이름은 '담덕'이다. 391년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에 죽기 전까지 많은 업적을 남겼다. 태왕은 즉위하자마자 귀족들이 사병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군대를 통일시키는 등 정복 전쟁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즉위 두 달 만에 병력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했다. 395년 9월에는 북쪽의 거란을 정벌하고, 포로로 잡혀 있던 고구려 백성들을 되찾아 왔다. 396년에는 다시 백제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태왕은 백제 아신왕의 아우를 비롯하여 10명을 인질로 삼고, 1000여 명을 포로로 데려왔다. 400년에는 신라 나물왕의 구원 요청을 받고 신라를 침범한 왜 군대를 몰아내고 가야국까지 진입하였다. 한편 고구려가 남부에서 전쟁을 치르는 중국에서는 후연이 침범하여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하고, 고구려인을 포로고 끌고 갔다. 태왕은 보복 공격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요동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410년에는 태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이것이 광개토대왕의 마지막 정복 활동이었다. 

 

5세기 고구려의 세력 확장

 

고구려의 정치체제

고구려는 초기 연노부(涓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로 불리는 다섯 부족이 중심을 이루었다. 다른 한반도의 고대 국가와 마찬가지로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했으며, 부족 연맹 체적인 성격이 강했다. 초기에는 5부의 부족장 중에서 선출된 자가 왕이 되었으나 시간이 흘러 중앙 집권화가 되면서 왕위는 세습제로 바뀌어 나갔다. 처음에는 연노부에서 왕이 배출되었으나, 이후에 연노부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동명성왕에 이르러서는 계루부에서 왕이 세습되었다. 절노부에서는 대대로 왕후를 배출하여 '왕비족'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백제의 정사암회의나 신라의 화백회의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서는 제가 회의가 귀족들의 협의기구 역할을 하고 국가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였다. 초기의 중앙 관제는 8~10등의 관등제를 보였다. 고구려 관등 조직은 형과 사자/사의 명칭을 중심으로 관등이 분화되어 있다. 형은 기존 족장 세력이 관리로 편입이 된 것이고, 사자 계열은 행정적으로 지위에 따라 여러 관등으로 분화한 것이다. 초기의 지방 행정은 부-성-곡-촌으로 나뉘어 있었다. 태수는 성을 책임지었고 곡의 책임자는 재라 불렀다. 북부여, 거란, 말갈, 신라 등의 속국에는 수사라 불리는 지방관을 파견했다.

 

고구려 무덤

고구려 사람들은 죽음을 무섭고 슬픈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살아갈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이 살고 있는 곳과 가까운 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무용총은 무덤 안에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하여 '무용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실제 무덤의 동쪽 벽에는 춤추는 다섯 명의 무용수를 중심으로 그들처럼 춤추는 사람과 곡을 연주하는 악사가 그려져 있다. 인물들이 입은 옷을 보고 당시 사람들의 옷차림을 알 수 있다. 서쪽 벽에는 '수렵도'가 그려져 있다. 네 명의 무사가 말을 타고 토키, 사슴을 사냥하는 그림이다. 장군총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돌을 쌓은 거대한 돌무덤으로 현재 중국 집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장군총은 화강석으로 7층이나 되는 높이로 지어졌고, 현재까지 형체가 남아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알려진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무덤의 땅이며 초기 수도였던 국내성이 있던 곳에 세워진 비석이다. 높이가 6.39미터, 무게가 37톤에 이른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20대 태왕인 장수왕이 아버지이자 19대 태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능묘 곁에 세운 비석이다. 비석에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출생부터 광개토대왕까지 왕위 계승, 영토를 넓힌 광개토대왕의 업적, 그리고 역대 왕의 무덤을 관리하는 사람을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의 첫 수도가 졸본 지역이라는 내용도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당시 동아시아에 펼쳐진 고구려의 막강한 세력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등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중원 고구려비

광개토대왕릉비와 더불어 고구려 역사와 세력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보물이 있으니 바로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다.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서 고구려의 영토가 한강 이남 오늘날 충청북도 충주 일대까지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원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비를 축소한 모습을 하고 있다. 423년 고구려 장수왕 때 축조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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