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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철의 나라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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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경상도 지방의 낙동강 유역에서 힘을 키우던 작은 나라였다. 열 개가 넘는 나라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가야는 또한 질 좋은 철을 생산하여 다른 나라에 수출한 철의 나라였다. 특히 철로 만든 여러 농기구나 무기들이 훌륭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에서 나온 김수로

낙동강 주변의 가야 지역에서는 왕 대신에 아홉 명의 촌장이 각각 자신들의 부족을 다스리고 있었다. 하루는 아홉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거북의 머리 모양을 닮은 구지봉에 모여 제사를 지다 그때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이 내게 너희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흙을 파고 노래를 부르며 나를 맞이하라." 그 말을 들은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을 테다."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얼마 뒤에 하늘에서 자주색 줄에 매달린 황금 상가가 내려왔고 그 상자 안에는 여섯 개의 황금알이 들어 있었다. 다음 날, 각 알에서 사내아이가 한 명씩 태어났다. 촌장들은 첫 번째로 나온 아이에게 '수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수로는 태어난 지 열흘 만에 늠름한 청년이 되어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다.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인도 출신 가야 왕비

어느 날, 붉은 돛을 단 배가 신라 김해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 배에는 인도의 공주인 허황옥이 타고 있었다. 수로왕은 그녀와 혼인하여 왕비로 맞아들였다. 허황옥은 이후 '허황후'라고 불리며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인 허 씨의 시조가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허황후의 고향이 인도 아유타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관가야

가야는 낙동강 주변에 자리 잡고 있던 금관가야와 그 밖의 여러 나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서로 힘이 비슷해 한 나라로 통일이 되지 못하고 각자의 지역을 독립적으로 다스리며 힘을 길렀다. 이 중 가장 발전한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가야를 이끌어 갔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아래쪽에 있는 김해 지역에 터를 잡았다. 이 지역은 낙동강을 따라 육지로 쉽게 오갈 수 있고, 바다를 통해 중국이나 왜와 무역하기도 좋았다.

가야국의 분포

철의 나라

가야는 '철의 나라'로 불리기도 했다. 그 이유는 금관가야가 있던 김해 지역에서 질 좋은 철이 많이 났기 때문이다. 가야인들은 철로 단단한 칼, 화살촉 같은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었으며 철을 이용해 물건을 사고팔기도 하였다. 철로 만든 무기를 가진 가야국의 군인들은 청동 무기를 가진 다른 나라의 군사들과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강했다. 훗날 가야가 있던 지역에서 철로 만든 갑옷, 투구, 무기가 많이 발견되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중국이나 왜에서는 질 좋은 철을 구하기 위해 금관가야와 무역을 했다. 이러한 무역을 통해서 부를 쌓은 금관가야는 다른 가야국들을 이끌어 갔다.

 

가야금

'가얏고'라고도 불리는 가야금은 가야 시대 가실왕 때 우륵이 중국의 악기를 모방하여 만든 악기라고 알려져 있다. 우륵은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 곡'을 만들어 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이후 대가야가 망하기 전에 가야금을 들고 신라로 넘어가 제자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가야의 토기

가야의 무덤에서는 여러 모양의 토기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토기들은 제사를 지내거나 죽은 이와 함께 무덤에 넣어주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가야인 들은 새, 수레, 배 모양의 토기를 만들기도 했는데 죽은 영혼을 저세상으로 데려다준다고 믿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공격

고구려가 북쪽 지방으로 영토를 넓히고 국력을 키워나갔다. 백제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가야와 왜와 힘을 합치기로 하였다. 가야는 신라가 자신들의 영토를 넘보자 왜와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의 신하가 되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은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왜군을 몰아내고 가야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가야국들은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큰 피해를 보고 서서히 힘을 잃었다.

 

대가야

고구려의 공격 이후 가야국에서는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중심 세력이 되는 나라가 등장하였으니 바로 '대가야'였다. 대가야는 금관가야와 달리 고구려의 공격을 거의 받지 않아서 이후 중심 세력이 될 수 있었다. 대가야는 힘을 키워 나갔으며 백제 땅이었던 섬진강 지역까지 차지했고 다른 나라와 무역도 시작하였다. 

 

가야의 멸망

고구려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본 금관가야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틈바구니에서 버티기가 어려웠고 결국 신라 장군 이사부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532년 항복을 하고 말았다. 562년 대가야는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멸망했고, 나머지 가야국들도 신라에 흡수되면서 가야는 사라지게 되었다. 가야는 철기를 이용하는 등 기술과 문화가 매우 발달한 나라였다. 그러나 여러 가야국의 힘이 비슷하고 다른 나라를 정복할 만큼 힘을 가진 나라도 없었다. 결국 가야는 내부적으로 한 나라로 통일되지 못하고 신라에 의해서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된 것이다.

가야인 들은 나라가 멸망한 뒤, 백제나 일본으로 갔으며 신라의 노비가 되기도 하였다. 신라는 항복한 가야인들에게 땅을 내주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금관가야의 왕족들에게는 진골 귀족의 신분을 주기도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가야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실제로 가야인들은 신라를 도와 백제를 공격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 또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가야가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였지만, 가야의 문화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이는 신라와 왜에게 까지 영향을 줄 정도였다. 최근에는 삼국 시대가 아닌 사국 시대로 불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가야국이 주변에 미쳤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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