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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백제의 등장과 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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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삼국 중에 가장 먼저 한강 주변의 땅을 차지한 나라이며 가장 일찍 멸망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가 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백제 또한 한반도에 정착한 강한 나라 중 하나였고 특히 왜와 활발한 교류를 하며 우리 문화를 전파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나라이다.

 

백제의 등장

고구려를 세운 주몽에게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유리가 주몽을 찾아오고 유리가 고구려의 태자가 되었다. 이에 비류는 바닷가 근처 미추홀에, 온조는 한강이 흐르는 위례성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웠다. 미추홀은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농사를 짓기에 부족했다. 이에 비류의 근심이 깊어져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며 이에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온조에게 의탁하게 된다. 온조가 터를 잡은 위례성은 한강 주변 넓은 들판으로 땅이 기름지고 물이 가까워 농사짓기가 좋았다. 유리한 자연환경에 비류의 백성까지 더해져 온조의 나라는 점점 커지고 힘이 세졌다. 이에 온조는 '십제'였던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친 후 700년 제국의 기틀을 마련해 나가게 된다.

 

두 개의 성

온조는 위례성을 첫 도읍지로 삼고 두 개의 성을 쌓았다. 그중 몽촌 토성은 언덕에 흙을 쌓아 단단하게 다져서 만든 성이다. 성벽의 바깥쪽에는 나무 기둥을 잇달아 박아 울타리를 세웠다. 그 둘레에는 도랑을 파고 물을 채워 적의 침입을 막았다. 풍납 토성은 편평한 땅에 인공적으로 벽을 쌓아 올린 성이다. 풍납 토성은 몽촌 토성보다 규모가 훨씬 커서 성을 짓는데 사람들의 많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기와를 얹은 궁궐과 관청과 제사를 지내던 곳이 발견되어 백제의 왕이 살았던 궁전이었을 거라고 추측된다.

 

고이왕

백제는 이미 남쪽에서 세력을 키워 가던 마한에 속한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목지국이 마한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제의 고이왕이 마한이 혼란이 틈을 타서 목지국을 정복하며 남쪽으로 점점 땅을 넓혀 갔다. 이제 백제가 한강 지역의 강자가 된 것이다. 고이왕은 무엇보다도 왕의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법을 정비하여 1품에서 16품으로 관리들의 등급을 나누었다. 그중 1품에 해당하는 관리 여섯 명을 '좌평'이라고 부르며 6 좌평에 각각 중요한 일을 맡겼다.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

고이왕의 뒤를 이은 근초고왕은 백제의 영토를 계속 넓혀 나갔다. 우선 가야를 정벌하고, 마한이 있던 땅을 정복해 남쪽으로 땅을 넓혔다. 이는 당시의 백제의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백제는 가야나 마한과 달리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 많고, 철을 다루는 뛰어난 기술 덕분에 강력한 철제 무기도 갖추었다. 이후 근초고왕은 고구려를 공경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이고 한반도의 많은 영토를 차지했다.

백제 전성기의 세력 범위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왜와의 교류

근초고왕은 '박사'라고 불리는 당시 백제 최고 기술자를 왜로 보냈다. 문에 뛰어난 '오경박사', 기와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와박사' 그리고 병을 잘 고치는 이를 '의박사'라 하였고 이들은 바다를 건너 기술을 전파하였다. 백제의 아직기는 왜 태자의 스승을 맡기도 하였다. 이러한 백제의 앞선 문물들은 일본의 문화가 발달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신라와의 연합 그리고 패배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백제의 북쪽 지역을 공격해 오자 백제의 아신왕은 힘을 다해 맞섰으나 결국 한강 북쪽의 영토를 고구려에 넘겨주게 되었다. 백제는 고구려와 맞서기 위해 중국의 송나라, 왜뿐만 아니라 신라와 손잡고 고구려에 맞섰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장수왕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로 쳐들어가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도읍지마저 빼앗아 버렸다. 

 

웅진성

도읍지를 고구려에 빼앗기고 왕까지 잃은 백제는 남쪽의 웅진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웅진은 북에 금강이 흐르고 차령산맥이 동서를 가로지르는 지역으로 고구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여기에 공산성을 쌓아 방어를 강화하였다. 한편 웅진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다툼은 치열해져만 갔다. 무령왕은 이런 싸움을 정리하고 왕위에 올랐다. 무령왕은 신라와의 외교를 강화하고 지방의 관리를 보내는 등 내치에도 힘을 썼다.

 

사비성

무령왕의 아들 성왕은 백제의 힘을 더 키우기 위해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고 가야 땅의 일부도 차지해 나갔다. 도읍지도 웅진성에서 사비로 옮기니 지금의 부여이다. 도읍지를 옮긴 성왕은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고 불렀다. 행정 조직을 갖추고 나라의 기틀을 새로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와 손잡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지역을 되찾기도 했다.

 

백제의 멸망

백제는 고구려와 맞서 신라와 힘을 합쳤으나 오히려 신라 진흥왕이 백제의 한강 지역을 빼앗으면서 양국의 관계가 틀어졌다. 이에 백제 성왕이 한강을 되찾기 위해 신라를 먼저 공격했으니 실패하고 성왕마저 죽임을 당하고 이후에도 두 나라의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백제 의자왕이 당나라와 손잡은 신라에 패하면서 백제는 사비성을 빼앗기고 700년 이어온 명맥이 사라지게 되었다. 백제인들인 이후 당나라나 왜에 건너가거나 신라의 백성이 되기도 하였다. 

 

백제의 불교

백제는 모든 계급이 불교를 숭상하고 부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조각이나 조형물을 많이 만들었다. 서산의 골짜기 바위에 세 명의 부처를 새겼는데, 이것이 '서산 마애 삼존불상'이다. 높이 10m가 넘는 거대한 암벽을 깎아 만들었다. 삼존상은 높이 2.8m의 석가여래입상을 중앙에 두고 높이 1.7m의 협시보살을 양쪽에 새겨 넣은 모습이다. 

백제 - 서산 마애 삼존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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