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탄생
지금의 경주 지역에 사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사로국은 여섯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촌장들이 각자 마을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촌장이 길을 가다 우물가 앞에서 자주색 알을 발견하였고 며칠 후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사로국 사람들은 박 모양의 알에서 나왔다 하여 박 씨 성을, 세상을 밝힌다는 뜻으로 혁거세라고 이름을 지었다. 혁거세가 청년이 되자 여섯 촌장은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를 사로국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발전하였다. 356년 내물왕 때부터는 김 씨가 박 씨와 석 씨를 몰아내었으며 이후 김 씨만이 왕이 될 수 있었다. 이후 왕의 힘이 강해졌으며 '마립간'이라는 왕의 호칭이 생겼다. '마립'은 신라 방언으로 말뚝을 의미하였으며 말뚝은 협조(자리를 정하여 둠)를 뜻한다고 한다. '간'자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북아시아 유목민족의 호칭 '칸'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신라의 원이름은 '사로국'이었다. 사로국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후 사라, 서라벌 등으로 부르다가 503년 지증왕 때부터 '신라'라는 이름으로 정해졌다. 신라란 '의의 어질고 착한 행동이 널리 영향을 미친다'라는 뜻이다. 신라 지증왕 때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을 기존 마립간에서 '왕'으로 부르게 했다.
신라의 불교
불교는 신라의 법흥왕 때 비로소 나라의 종료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불교가 받아들여질 때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기존에 하늘, 물, 땅의 신 등을 섬기고 있었으며 귀족들은 자신들의 힘이 왕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불교를 극렬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법흥왕의 신하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귀족들도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차돈은 왕과 미리 약속하고 귀족들이 제사를 지내던 숲에 절을 지었다. 이를 반대한 귀족들이 법흥왕에게 이차돈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흥왕은 귀족들의 뜻에 따라 이차돈의 목을 벴다. 그때 이차돈의 목에서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에서는 꽃잎이 내려왔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은 그 모습을 부처님의 기적이라 믿었고 불교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에서는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다음 생에 왕이나 귀족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가리키며 왕과 귀족의 통치에 유리한 사항을 전파해 주었다. 자신들의 통치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귀족들도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토대로 힘을 키웠다.
화백회의
신라 귀족들은 나라의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할 때 회의를 통했으며 이를 '화백회의'라고 했다. 진골 귀족들이 참여하였으며 모두 찬성해야만 통과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화백회의에서 정해진 결정은 매우 막강하여 왕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골품제
골품은 '뼈의 등급'을 의미한다. 개인의 골품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제아무리 똑똑하더라도 귀족이 아니라면 높은 벼슬에 오를 수가 없었다. 골은 성골과 진골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아래 6/5/4/3/2/1두품 순이었다. 3/2/1두품은 평민 계급이 속한다.
화랑도
신라의 '화랑도'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인재를 교육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진흥왕 때 세워졌다. 화랑은 '꽃같이 아름다운 사내'라는 뜻이며 실제로 귀족 가문의 잘생긴 자녀들이 화랑으로 선발되었다. 그들은 곳곳을 누비며 글과 무술뿐만 아니라 춤, 노래 등의 예술 분야도 배우고 익혔다. 실재 화랑도에서 신라의 많은 인재가 발굴되었으며 이후 삼국 통일에 기여한 김유신, 김춘추, 관창도 모두 화랑 출신이었다.
진흥왕의 업적
진흥왕은 신라의 제24대 국왕으로 신라의 부흥기를 이끈 왕으로 알려져 있다.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 한강 주변 지역을 백제와 나누어 가졌다. 이후에 백제마저 물리치고 한강 유역을 신라가 모두 차지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진흥왕은 영토를 남북으로 넓혔으며 서해를 통해 중국과의 교류도 가능해졌다. 진흥왕은 땅을 넓히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순수비를 세웠다. 오늘날 북한산 꼭대기에 있는 북한산비, 가야지역의 창녕비, 함경도의 마운령비, 황초령비를 통해 당시 신라의 영토가 광활했음을 알 수 있다.
가야의 정복
신라와 가야의 힘은 초기에 비슷하였으나 고구려 광개토 대왕이 가야 땅을 공격하면서부터 가야의 힘이 약해지게 된다. 이때 신라 법흥왕이 이사부 장군으로 하여금 금관가야를 공격하고 정복하였다. 이후 진흥왕이 대가야까지 정복하면서 다른 가야국들도 신라에 복속되었다.
선덕여왕, 최초 여왕의 탄생
진평왕이 죽고 그의 첫째 딸 덕만이 왕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고 성골 출신만이 왕이 될 수 있다는 당시의 상황이 여왕 탄생의 배경이 되었다.
선덕여왕은 비록 여인이지만 자신이 하늘의 뜻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으로 보이기 위해서 첨성대를 만들게 하였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당시에도 천문기술이 발달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27대 왕이었던 선덕여왕을 기념하기 위해서 27단으로 쌓았으며 12달을 뜻하기 위해서 네모난 문의 위아래로 돌을 열두 단씩 쌓았다고 한다. 사용된 돌의 개수는 365일을 뜻하기 위해서 365개 내외로 하였다.
신라의 승려 자장이 중국의 당나라로 갔을 당시에 꿈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구 층 탑을 세우면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을 하였고 이를 선덕여왕에서 전하였다고 한다. 이에 선덕여왕은 구 층 탑을 세우라 명령했다. 구 층은 중국, 왜 등 주변에 있는 아홉 나라를 의미한다고 한다. 약 17년이나 걸려서 완성된 이 거대한 나무 탑은 현재 기준 25층의 높이에 해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려시대에 불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복원한 건축물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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