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북쪽에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세력을 키워가는 한편 중국 땅에서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세워졌다. 거란은 926년 발해를 쓰러뜨리고, 중국 북쪽의 땅을 차지한 후 낙타를 보내는 등 고려와의 교류를 원했다. 하지만 왕건은 이를 거절했다. 고려는 오히려 송나라와 교류하며 거란을 견제했다. 송나라를 차지하고 싶었던 거란은 거란이 송나라를 공격할 때 고려가 거란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고려를 먼저 굴복시키기를 원했다.
거란의 침입과 서희의 담판
993년 거란군이 고려를 공격해 왔다. 거란은 옛 고구려의 영토를 내놓고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고려의 서희가 거란의 총사령관 소손녕을 찾아가 협상하였다. 서희는 고려가 거란을 멀리하고 송나라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에 서희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이 길을 막고 있다고 주장하고 여진이 없어진다면 송나라와 관계를 끊고 거란에 사신을 보낼 것을 제안하였다. 이 담판으로 거란은 물러가고 서희는 여진을 몰아내고 강동 6주에 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를 오히려 확장했다. 강동 6주는 평안북도 해안 지방에 설치한 6개의 행정 구역으로 응화,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지역을 일컫는다.
강조의 난과 거란의 2차 침략
1010년 요 성종은 40만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당시 고려에서는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이 폐위되고 대량원군 왕순을 고려왕으로 옹립 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거란은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거란은 고려를 먼저 공격하여 고려를 굴복시켜 송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발판을 삼고 싶었다.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다. 하지만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의 항전으로 흥화진을 함락에 실패하였다. 거란은 흥화진을 그대로 두고 통주로 진격하는 방법을 택했다. 고려에서는 강조가 이끄는 30만 군이 통주에서 거란을 막아 싸웠으나 패하고 강조마저 거란 황제 성종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후에 거란은 통주에 이어 곽주, 안주를 등의 성을 함락하고 개경까지 손에 넣었다. 현종은 강감찬의 제안을 따라 항복 하지 않고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몽진하였다. 헌종은 경기 광주를 지나 천안, 공주를 거쳐 전라남도 나주까지 내려가게 되고 이 과정에서 지방 호족에 수모를 당하거나 공격을 받기까지 하였다. 피난 생활 중의 현종의 경험은 전쟁 이후 국정 운영 방향을 결정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거란 철군 이후 현종은 추락한 왕권을 회복하고 내부를 안정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거란은 비록 개경을 함락하긴 하였으나 고려왕을 확보하지 못하자 남진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거란군은 북쪽의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급선이 차단되었다. 여기에 고려가 사신을 통해 화친을 청하자 제후국의 왕이 황제국의 황제를 직접 알현하러 간다고 하는 이른바 '친조 (親朝) '를 조건으로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때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국을 귀주에서 맞아 공격하여 거란으로 잡혀가던 많은 고려인 포로를 구하였으나 전투 중 양규는 전사하고 만다.
3차 고려 거란 전쟁
거란이 물러가고 1011년 현종은 개경으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현종은 친조 (親朝) 를 행하지 않고 시간을 끌며 내부적으로 국력을 키웠다. 이에 1018년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고려에서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고 20만 대군으로 거란의 침략에 맞섰다. 고려는 압록강 근처 흥화진에서 거란을 맞아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흥화진 골짜기의 냇물을 쇠가죽으로 막았다가 거란군이 건널 때 터뜨렸다. 갑작스럽게 불어난 물에 거란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공격하여 거란을 격퇴하였다. 이러한 패배에도 소배압은 계속 진격하여 개경과 멀지 않은 신은현까지 도달하였으나 개경을 지키는 고려군을 격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군사를 돌렸다. 강감찬은 후퇴하던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대회전을 치르게 된다.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고 때마침 개경에서 거란을 추적하던 고려의 기병이 가세함에 따라 거란군의 대부분을 섬멸하게 되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귀주 대첩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몇천명 밖에 되지 않았다. 세 번의 거란의 침략을 격퇴한 고려는 이후 송나라와 거란과 자주적인 입장에서 외교를 할 수 있었다.
천리장성
거란을 격퇴한 고려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현종은 강감찬이 건의한 대로 거란과 여진의 공격을 막기 위해 개경이 도성에 성을 쌓았으며 압록강 끝에서 동해안의 영흥까지 국경을 따라 '천리장성'을 쌓은지 12년 만에 완성이 되었다.
고려의 전성기
거란은 고려와의 전쟁 패배로 침체기로 접어들게 되었고 송나라는 숨통이 트였으며, 고려는 이 승리로 동아시아 국제외교의 주도권을 잡는 위치를 가지게 된다. 또한 거란과 긴 전쟁이 끝난 뒤 고려의 평화 시대가 찾아왔다. 현종,덕종, 정종 그리고 문종으로 이어지는 고려왕조의 전성기를 이루며 70~80년간 태평성세를 이루었다. 문종은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고려에 맞도록 고쳐 쓰는 한편 불교를 발전시켰다. 여진을 토벌하여 영토를 넓히기도 하였다. 또한 예성강 근처의 무역한 벽란도를 통하여 동남아시아와 아라비아 상인들도 이곳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다. 고려는 벽란도를 통하여 인삼, 비단 등을 송나라 및 아라비아 상인들과 무역하였으며 송나라의 차, 약제, 책 등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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